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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와의 대화를 통해 본 신대엽의 그림세계

토크 진행자: 소설가 하창수

동양에서 묘사는, 묘(描)와 사(寫) 모두 ‘그린다’는 뜻으로, 묘사는 그 자체로 그림, 혹은 그리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영어로 묘사를 뜻하는 describe는 ‘서술하다, 글로 쓰다’를 가리킨다. 어느 어원학자는 우리말 ‘그림’의 어원이 ‘그리움’이라고 하던데, 일리 있는 얘기인 듯하다. 어원학자는 뭔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그림’을 낳고, 그 그림에서 ‘글’이란 말이 생겨났다고 했다. 문학에서 묘사는 ‘그림을 그리듯 써내려간 글’을 가리키고, 미술에서 ‘묘사’는 보통 ‘대상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화가 신대엽의 작업은 ‘묘사’에 가장 근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작가 본인에게 ‘묘사’는 무엇인가?

중국 당송시대 대가들에 대해, 그들에겐 자연과 같은 창조능력이 있다고 논해진다. ‘자연과 같은’이라는 것은 그들 나름의 독자적 실재성을 창조했다는 의미다. 그린다는 것, 묘사한다는 것은, 대상을 그대로 똑같이 그린다는 의미가 아니고 자연스러움을 얻었다는 뜻이다. 똑같이 그릴 수 있는 능력은 자연스러움을 얻기 위한 조건이나 수단이다. 화면에 어떻게 펼치는가에 따라 장르가 달라지는 것이다. 글에 비유를 하자면, 시가 되기도 하고 소설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묘사의 궁극 역시 대상과의 유사성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움과 아름다움의 문제로 다가가야 한다. 똑같이 그렸다는 건 똑같이 그렸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닐 수 있으며,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할 수도 있다.

평소 작가는 ‘예술’에 대해 일종의 거부감을 드러내곤 했다. 예술에 대한 거부감의 실체는 무언가?

예술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감은 아니다. 굳이 설명하자면 “그림을 그린다는 것만으로 예술, 혹은 예술행위를 한다고 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이건 미술에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분야마다 ‘궁극’에 닿아 있는 천재들이 있고, ‘예술’은 그들의 행위를 상징하는 이름이다.

미술 분야에서 예를 들어 달라.

고흐는 천재라고 할 수 있다. 기술적으로 그림을 잘 그린 사람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감상자들이 “좋다,”라는 느낌을 받는 화가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런 느낌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작품들을 만들어냈다면, 그는 천재라 할 수 있고, 그걸 예술이라 할 수 있다.

고흐 얘기를 하니까 미켈란젤로가 떠오른다. 그는 완벽한 구성과 묘사를 바탕으로 한 그림들을 수없이 그려낸 데다 ‘다비드상’ 같은 완벽한 비례를 가진 조각도 만들어냈다. 그런데 미켈란젤로는 500년 전의 사람이다. 500년이 지난 지금 과연 미켈란젤로에 견줄 만한 화가가 몇 사람이나 될까? 이 물음은 좀 가혹한데, “미켈란젤로 정도의 작업을 할 수 없다면 붓을 내려놔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얘기로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얘기지만, 묘사의 궁극만으로 예술을 얘기한다면, 미켈란젤로나 다빈치에서 그림은 끝났다. 하지만 이후 인상파 시대로 넘어가면서 ‘다른 그림’이 그려졌고, 이후 서양미술은 순수구상 계열을 버림으로서 다른 쪽으로 눈을 돌렸다. 이른바 현대미술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순수구상의 추구가 끝났다고 해서 순수구상의 의미나 가치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아름다운 것은 여전히 아름다운 것이다. 이전에 누군가 궁극의 미인도를 그렸다고 해서 더 이상 미인도가 그려져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아니다.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차원에서 질문하는데, 작가가 그리려는 대상과 싱크로율 100% - 이게 묘사의 궁극이 아닌 이유는?

대상과 똑같이 그린다는 건 일종의 관념이다. 내게 묘사는 기술적인 것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어렸을 때, 시골에 살던 가난한 집안의 친척 누나가 가사도우미를 하려고 서울에 왔다가 며칠 우리집에 머물렀는데, 잠자리에서 누나가 들려준 옛날이야기가 참 재미있었다. 옛날얘기는 부모님한테서도 들었고 다른 사람들도 해주었지만, 그 누나가 들려준 옛날얘기는 아직까지 기억에 생생하다. 그때 그 누나가 옛날얘기를 들려준 건, 말하자면, 예술이었다. 똑같은 대본을 주고 얘기를 해보라고 했을 때 누구나 다 그 누나처럼 하진 못할 것이다. 예술은 일정한 예술의 형식이 있는 게 아니다. 예술은 기술이나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감성에 호소하고, 공감을 끌어내는 무엇이다.

굳이 대상을 똑같이 그린다는 것과 결부시켜 얘기하면, 묘사의 궁극은 똑같이 그리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 그릴 수 있는가의 문제다. 조선시대 초상화를 보면 수염 한 올 한 올, 피부의 질감을 내기 위한 육리문(肉理文)이라고 하는 연한 잔 붓질, 흉배의 자수에 놓인 실 한 땀 한 땀에까지 공을 들인다. 덥수룩한 수염은 사실 우리 눈에는 덩어리로 보이는데 서양화의 표현방식이 실제 보이는 것에 훨씬 가깝다. 여기까지는 기술적인 문제고, 예술은 여기서부터 비로소 시작된다.

서양에서 ‘예술’을 지칭하는 ‘art’라는 말에는 ‘기술’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동양에서 ‘예술’이라고 할 때의 ‘술(術)’도 기술을 뜻한다.

그렇긴 하지만 기술 그 자체가 예술일 수는 없다. 굳이 얘기하자면 ‘기술의 극한’을 예술이라고 할 수는 있다. 중요한 것은 기술과 예술이 분리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예술을 위해 일단 기술적인 연마가 필요하다. 기본적인 기술적 연마 없이 자신의 작업을 ‘예술’이라고 칭하거나 확신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내가 가진 예술에 대한 일종의 거부감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고, 내가 부단히 기술적 연마에 힘쓰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만약 기술 없이 예술이 되는 경우가 있다면, 기운생동(氣運生動)을 타고난 사람에게서나 볼 수 있는 지극한 예외일 것이다.

대상의 정밀한 묘사를 바탕으로 하는 구상화와 반대편에 추상화가 있다. 추상도 예술이라고 한다면 묘사의 궁극만이 예술은 아니라는 말이 성립될 것 같다.

묘사나 기술적인 궁극을 예술이라고 해버리면 기술이 결여된 것은 결코 예술이 될 수 없다는 것으로 연결되는데, 이건 아니다. 예술에는 기술적인 것으로만 얘기되어질 수 없는 어떤 부분이 있다. 앞서 거론했던 고흐가 그 대표적인 예다. 그에겐 기술을 넘어서는 뭔가가 있고, 그것이 ‘예술’을 이룬다. 그걸 타고나는 사람이 있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는데, 지금은 동양화를 하고 있다. 여러 가지 점에서 서양화와 동양화는 다르다. 언젠가 동양화 작품 앞에서 “이건 동양화라고 할 수 없다,”라고 말한 걸 기억한다. 분명히 동양화용 먹과 붓으로 작업한 작품이었는데, 그렇게 말한 이유가 무언가?

조선시대 그림과 인상파까지의 서양그림을 비교하면 누구나 그 차이를 구분할 수 있다. 현대에 오면 그런 구분이 불명확해지고, 구분하는 게 그다지 의미도 없어진다. 이것은 상식에 속한다. 하지만 동양화와 서양화를 구분하는 중요한 포인트가 있는데, 바로 언어와 이미지다. 조선시대까지의 그림들은 언어와 그림을 분리시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림보다 언어에 가까웠다. 서양화는 언어와 그림이 또렷하게 분리되는 특징이 있다. 가령, 풍경화를 예로 들어보자. 서양 풍경화는 풍경이 있는 곳으로 화가가 직접 가서 마치 사진을 찍듯 보이는 그것을 캔버스에 담는데 반해, 동양화에서 풍경화는 자신이 다녀온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주듯 화면에 담는다. 바위산을 다녀왔을 경우, 서양화가는 바위산을 그리지만, 동양화가는 그 바위산의 입구로 들어가 풀숲을 지나고 개울에 걸쳐진 돌다리를 건너고 나지막한 봉우리를 비껴간 뒤에 절에 당도했다, 라는 식으로 얘기를 해주듯 구성한다. 이런 구성이 바로 이미지보다는 ‘언어’에 가깝다고 하는 이유다. 구성 뿐 아니라 묘사에 있어서도 이 나무는 이런 식으로 가지를 뻗고 이렇게 잎을 내고, 물은 이렇게 굽이친다고 표현한다. 엄밀한 관찰 뒤에 나오는 재창조다. 사진 같은 사실성은 아니지만 실재라고 느끼게 만드는 방식이 동양화의 특징이다.

조선 후기의 화가 정선(鄭歚)의 그림들을 진경산수(眞景山水)라고 하는데, 화가가 실제로 직접 가서 보고 그렸다는 뜻이 아닌가?

정선의 그림을 ‘진경산수’라고 하는 것은, 그 이전의 많은 산수화들이 화가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산수화 진적들이나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무릉도원 같은 관념상의 풍경들을 화폭에 담은 데서 상대적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정선의 그림들이 실제 눈으로 보는 것과 똑같은 것은 아니었는데, 일정한 시점(視點)에서 그려진 그림은 거의 없고, 때로는 지도처럼 그린 것들도 있었다. 동양화의 특징인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부감법(俯瞰法)도 정선의 진경산수에 그대로 나타난다. 드론으로 내려다보듯이 재구성한 것은 서양화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직접 가서 보고 그린 것은 분명하지만 표현은 서양화의 시각적 재현과는 다른, 관념적 방식을 택한 것이다.

동양화를 품평할 때, 가장 많이 활용되는 것이 육법인데, 중국의 사혁(謝赫)이란 사람이 당나라 이전의 그림들을 여섯 가지 기준, 즉 기운생동(氣運生動), 골법용필(骨法用筆), 응물상형(應物象形), 수류부채(隨類賦彩), 경영위치(經營位置), 전이모사(轉移模寫) 등으로 평가한 것이다. 사혁은 육법 가운데 기운생동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작가의 생각은 어떤가?

생동감과 기품을 뜻하는 ‘기운생동’은 고귀한 품성처럼 타고나는 것인 듯하다. 흉내 정도는 낼 수 있겠지만, 보고 배워서 터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나는 ‘경영위치’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구성이나 구도를 뜻하는 화면에서의 ‘자리 잡기’는 옛 비평가들도 그림에서 중요한 덕목으로 꼽았다. 그런데 구도를 잡는 것에도 동양화와 서양화에는 차이가 있다. 가령, 서양화에서는 원근 구도를 철저하게 지키지만, 동양화에서는 뒤에 있는 것을 앞의 것 위에 그리는 식으로 위치시킨다. 산 위쪽에 바위가 있거나 바다가 있는 그림들이 이런 예다. 앞서 “동양화가 언어적 표현에 가깝다,”고 한 얘기가 여기에 해당되는데, 산 위에 바다를 그리는 것은 “저 산을 넘어가면 바다가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경영위치가 구도만을 얘기하는 건 아니다. 높은 산허리를 구름이 감고 있거나 절벽의 노송이 아스라이 매달려 있는 모습 같은, 표현의 기술적 부분도 경영위치의 몫이다. 고개를 어떻게 기울이고 있고, 손의 모양을 어떻게 잡는가에 따라 대상의 내면, 정서적인 측면까지 드러나는데, 이렇게 보면 경영위치와 기운생동은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관련성을 가진 요소라 할 수 있다.

경영위치는 ‘구도의 안정감’과도 관계가 있나?

관계는 있지만, 구도의 안정감이라는 게 긴장감 없이 화면을 채우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삐딱하게 놓든 한쪽으로 치우치게 놓든, 어디에 배치하는 게 더 좋은지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중요하다. 대칭이 맞아 안정감이 생기더라도 좋은 배치가 아닐 수도 있다.

감상자가 불편하게 느낀다면?

사람마다 다른 것 같다. 그래서 어렵다. 구도만이 아니라, 예술이나 테크닉,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 들이 모두 달라서 어느 것 하나 명확하게 정의를 내린다는 게 쉽지 않다. 변수가 너무 많고 다양해서 증명이 불가능한 경우가 허다하다. 감상자가 불편하게 느낀다고 해서 그 그림이 안정되지 않았다고 얘기하기도 힘들다. 작가와 감상자 사이에는 늘 이런 충돌이 있게 마련이다. 대중들이 주목하지 않는 작품들 중에 예술적으로 뛰어난 작품들이 없겠는가?

묘사, 묘사의 궁극 같은 얘기들을 많이 했는데, 이제껏 작업해온 작품들 중에서 작가 본인이 충분히 만족하는 작품이 있는가?

앞서도 얘기했지만, 내 작업은 공부의 연속이다. “이건 온전히 내 작품이다,”라고 말할 만한 작품이 없다. 모두가 옛날 그림들을 보면서 이런 걸 한 번 그려봐야겠다, 싶어서 그린 그림들이다. 인물화는 동양화를 시작하면서부터 해보고 싶었는데, 지금까지 공부를 하면서 내 능력으로 어디까지 구현해낼 수 있는지를 계속 가늠해보고 있다. “이 정도까지는 해낼 수 있지 않을까, 계속하면 저기까지는 할 수 있겠구나,” 싶은 지점이 있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내 그림이란 걸 해보고 싶다”는 얘기를 하곤 했는데, 2년쯤 지나면 뭔가 다른 그림들을 그려낼 수 있을 것 같다.

그게 예전에 자주 얘기했던 ‘여사잠도’나 ‘고려불화 급’ 인물화인가?

고려불화는 내가 보기에는 개인이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닌 듯싶다. 미켈란젤로의 천장화도 개인이 남길 수 있는 작품이 아니듯이. 화가 집단의 협력이 필요하든, 건물주의 재력이 뒷받침되든, 그 시대가 만들어내는 그림이다. 시대와 환경, 많은 인력이 결합해 만들어진 것이다. 고려 불화는 세계 최고수준의 미술작품이지만, 불교의 위세가 사라진 조선시대에 들어와 맥이 끊어졌다. 고려불화는 동양화로서 최고의 예술작품이다. 내가 거기에 닿을 수 있을지, 계속 공부해나가고 싶다.



음영을 표현하는 음영법(陰影法), 혹은 훈염법(暈染法)과 함께 조선후기에 등장한 초상화의 기법으로, 얼굴의 표정을 나타내기 위해 피부의 질감을 표현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기본적으로 살결 방향에 따라 붓질을 하는데, 눈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얼굴 전체의 살결 방향을 표현하며 골상을 피부결이나 근육결에 따라 잔 붓질을 가하여 음영을 묘사한다.

기술(technology)이란 말은 그리스어(語) '테크네(technē)'에 유래되는 유럽계 언어의 번역어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어원적(語源的)으로는 예술·의술 등을 포함.

부감법(俯瞰法): 높은 곳엣 멀리 아래를 굽어 내려다본 모습으로 그리는 것을 말한다. 새가 높이 날아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 같다고 하여 조감법(鳥瞰法)이라고도 한다.

《여사잠도》는 동진東晉의 저명한 화가 고개지顧愷之의 작품으로 서진의 장화 張華가 쓴 《여사잠女史箴》을 바탕으로 해서 그린 그림이다. 원문이 12절로 된 것을 따라 그림도 12단으로 구성한 것인데 현존하는 당唐 모본은 9단만 남아있다. 비단에 채색하였으며 크기는 세로 24.8cm, 가로 348.2cm이다. 이 그림의 원작은 망실되었고, 현존하는 모본 중에 수준이 떨어지는 남송南宋 모본은 타이완의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이 소장하고 있고, 여러 사람들이 기록에 쓰고 있는 당唐 모본은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그림과 장화張華의 원문은 궁중여인들에게 봉건도덕을 가르치고 군왕에 대한 충성을 선양하며 신을 공경하고 지아비를 따를 것 등에 대한 훈계를 담고 있다. 이 그림을 가장 먼저 실은 것은 송대의 《선화화보宣和畵譜》이며, 중국미술사에서 대단히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는 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