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ords of Things

벽과 문, 안 혹은 너머- 서숙희 2020〈사물의 기록〉전에 부쳐

그림은 대상을 화면 안에 재현再現하는 매우 단순한 행위다. 그림과 관련된 단어들은 모두 이 ‘다시 나타나게 하는 것’과 관련된다. 드로잉, 페인팅, 묘(描), 사(寫), 화(畵)는 대상을 화면에 끌어오고, 칠하고, 베끼고, 그리는 행위 그 자체다. 화가란 이런 일들을, 그럴 듯하게,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저마다 생각이 다르듯 대상을 화면에 나타나게 하는 ‘방식’도 다르다. 미술사美術史는, 거칠게 요약하면, 대상을 옮겨놓는 방법적 차이의 역사다. 매우 정밀하게 옮겨놓거나, 특징적인 한 면을 부각시키거나, 빛이 닿는 부분과 그늘진 부분을 대비하거나, 수없이 많은 점들로 나타내거나, 일그러뜨리거나.

서숙희 또한 그만의 방식으로 대상을 화면에 재현한다. 그런데 그 방식이 독특하다. 서숙희 방식의 독특함은 대상을 화면에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깊이 숨기거나 아예 지워버리는, 혹은 극히 일부만 드러낸다는 점에서 생겨난다. 감상자들에게는 불친절하기 짝이 없는 이런 방식을 취한 화가들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지만, 2020년 〈사물의 기록〉전에 나온 작품들만으로 보자면 ‘서숙희 표’라고 해야 할 것들이 압도적이다. 사실, 서숙희에게서 대상을 지우고 숨기고 일부만 드러내는 경향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은 아니다. 그 연원을 찾아가는 일은 그 이유를 밝혀내는 일만큼이나 흥미로운데, 2011년 ‘오래된 숲_가을’, 혹은 2013년의 ‘밤담배’와 ‘어느 푸른 저녁’, ‘여우가 우는 밤 술 마시기’, ‘술 마시는 여자’ 연작에서 단초를 찾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2016년의 개인전 〈집과 밤〉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사물의 기록〉은 더 이상 낯설지 않을 것이고, 낯설기는커녕 “이제 여기까지 왔군,”이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일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왜?”에 있다. 서숙희는 왜 대상을 명확히 드러내지 않는 걸까? ‘사물’을 ‘기록’한다고 해놓고, 정작, 그는 왜 사물을 지우고, 감춰버린 것일까? 작가에게 물어봐도 답을 들을 수 없다는 걸 나는 안다. 언젠가 비슷한 걸 물었을 때 들었던 “뭐, 그냥······그렇지 뭐.”라는 것 이상의 답을 기대하는 건 무리다. 그의 ‘그냥’이라는 말 뒤에는 왠지 ‘설명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 생략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작가가 설명해주지 않는다면, 감상자가 찾아낼 도리밖엔 없다. 그가 내놓은 ‘그냥’이라는 부사를 그냥 받아들였다가는 아무 것도 건져내지 못한다. 사실, 20여 년 동안 그에게서 가장 많이 들은 얘기가 “그냥 뭐”였다. 하지만 그에게서 그냥 나온 건 단 하나도 없다. 서숙희에게 ‘그냥’은 철저·치밀·계획·의도·확신이라는 명사와 다르지 않거나 완전히 일치한다.

전시회 막바지 작업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의 작업실을 찾았을 때, 이미 완성이 되어 걸려 있거나 거의 끝나가고 있던 작품들을 보면서 나는 두 개의 ‘사물’을 발견했다. 그 하나는 ‘벽’이고, 다른 하나는 ‘문’이었다. 벽과 문 - 따로 존재하기도 하고, 같은 공간에 놓여 있기도 한 그 두 개의 ‘사물’은, 과장을 조금 보태서 말하자면, 하이퍼리얼리즘만큼이나 또렷했다. 벽은 벽 특유의 투박한 질감을 그대로 드러냈고, 오래도록 닫혀있기만 했을 것 같은 문은 밀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그 두 개의 사물은, 그러니까 벽과 문은, ‘이쪽’과 ‘저쪽’을 완강하게 차단했다. 해체되기 전의 베를린장벽처럼. 오래 전 주인이 떠나버려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는 궁벽한 어느 시골집의 닫혀 있는 문처럼.

벽壁은 뭔가를 막기 위해 세워지는 것이고, 문門은 굳게 닫혀 있어야만 문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화면에 옮겨진 ‘벽’과 ‘문’은 더 이상 벽과 문이라는 ‘사물’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기능의 가치를 판단하게 만들고, 기능을 의심하게 만들고, 그것이 차단한 ‘이쪽과 저쪽’, ‘안과 밖’을 궁리하게 만들고, 마침내 벽을 뛰어넘거나 통과하게 만들고, 문을 열거나 부수도록 압박한다. 이는 벽을 세운 것이 우리들이고, 문을 완강하게 닫아놓은 것 역시 우리들이라는, 차단의 주범이 우리들 자신이란 사실을 자백하도록 강요한다. 이게 만약 화가 서숙희가 노린 것이라면, 〈사물의 기록〉은, 일단 성공한 것이다.

하창수(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