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숙희
다른공간들
작가의 그림 속 그 곳엔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는 벽과 모서리, 화폭에 드리워진 그림자와 빛과 음영들을 본다.
여러 차례의 붓질로, 혹은 반복적인 긁기로 남겨진 흔적들은 그리려는 것인지 무언가를 지우려는 것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무엇도 없 는 그 공간에서 존재의 흔적들을 발견하며 위안을 갖는다.
단 세 개의 선으로 공간을 드러내는 모서리와 그 곳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2차 원의 평면 속에 전혀 다른공간을 만들어 낸다. 깊숙한 공간 위로 새겨진 그림자 를 통해 ‘나 자신이 부재한 그 곳에 존재하는 나’를 보게 되는 것이다. 내가 없으나 있는 공간, 혹은 그 사람이 있으나 없는 공간, 부재하나 존재하는 공간 이 바로 작가가 말하는 ‘다른공간’이다.
특히 작가는 존재에 대한 표현을 ‘흔적’이라는 방식으로 표출한다. 흔적 (trace)이란 데리다가 현존하지도, 부재하지도 않은 영역이라고 언급하였으며, 이 는 작가의 표현방식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생채기를 내듯 표면을 긁고 다시 채우고 다시 긁는 방식은 마치 대상을 불러오고 다시 지우고, 또 다시 불러오려 는 행위와도 같다. 그렇게 만들어진 화면에는 작가가 만든 흔적만이 기록되고, 마치 대상없는 기다림처럼 반복되는 일상의 순환과도 같은 과정만이 남는다. 우리는 무엇을 그렸는지 물을 필요도 없이 작가가 새겨놓은 다른공간, 그 구석 에 그저 영혼의 한 켠을 뉘어 쉬어가면 된다.
정현경 -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