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ord of Things

잘 모르겠는 서숙희, 론(論)

그와 나는 많이 다르다.
내가 밥을 먹자고 하면 그는 술을 마시자고 한다.
그는 웃는 상에 나직한 목소리를 가졌지만
나는 잘 찡그리고 조용한 편도 아니다.
그는 고집이 세다.
나도 고집이 있지만 그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그가 이번 도록에 들어갈 글을 써달라고 했다.
나는 두어 번 거절했지만 그는 들은 체 하지 않았다.
원고 매수도 기한도 정해주지 않은 채
심지어 재미있게 쓰라고까지 했다.
이건 청탁이 아니라 그의 고집에 내가 진 셈이다.
엄마 다음으로 밥상을 많이 차려준 그였기에
앞으로도 나는 질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처음 그를 본 날을 기억하고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봉의산 가는 길>이 옥천동에 있던 시절 그는 고3인
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남편에게 인사를 해왔다.
나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과 있었다.
나중에 남편한테 누구냐고 물었더니 화가 부부라는데
자기도 처음 보는 분들이라고 했다. 어둑한 조명만큼이나
부스스한 차림의 그가 쉬 잊히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인과 더불어 그의 집을 가게 되었다.
우리 부부가 온다기에 창호지를 새로 발랐다고 했다.
가을이면 할머니가 코스모스나 국화잎을 넣어
문창호지를 새로 바르곤 했었다. 다시 그 풍경을 보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마루에 앉아 보는 건 또 얼마만인가.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는 동안 할머니 집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푸근했다. 그와 그렇게 만났다.

‘저렇게 아무렇게나 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니….’
그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었다.
집에 와보고서야 내가 얼마나 얄팍했나, 반성했다.
그는 세상의 잣대로 자신을 꾸미기보다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 사람’이었다.
나도 검정색을 좋아하지만 검정색옷만 입지는 않는다.
내가 알기로 그는 딸의 결혼식 날을 제외하곤
거의 검정색옷만 입는다.
그는 시를 좋아하지만 나는 시를 두려워한다.
나는 그의 그림에서 종종 시 한 구절을 읽어내곤 했다.
그의 어떤 그림이든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누구라도 그가 시인임을 눈치 챌 수 있다.


<엄마의 김장밭>

갓씨를 뿌리고 옆에 있던 두릅 잎을 따다 덮어 놓았다.
참새가 흙이 고운 밭에서는 모래목욕을 하느라 씨앗을
흩어놓기도 하기 때문이다. 무는 한창 자라고 있고
배추는 갓 모종을 옮겨놓아 아직 여릿여릿하다. 물을 주고
벌레를 잡아주다 보면 찬바람에 배추속이 단단해지고
노랗게 여물어질 것이고 서리가 내릴 것이다.

알고 보니 그는 이미 오래 전 홍대문학상을 받을 뻔한
‘시인’이었다. 홍대문학상에 당선이 되었으나 막 휴학했다는
이유로 수상까지는 이어지지 못한 안타까운 사연이 있다.
그 시를 소개하고 싶다. 스무 살, 만 열아홉에 쓴 시다.


<이 땅에>

길(路)
일년생 들풀


일년생 들풀
……
더는 오르지 못하고.

허정허정 떠도는
꿈이랄까
꽃씨랄까
그들이 다시 들풀
이름을 달고 돌아 올 때까지

무료
권태
물구나무서기
기다림

한 번도 스스로 깨어나지 못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우리의 이름이 기억에도 없이 사라져
앉은 자리에서 스스로
우리가 이름 지으며
겅중 겅중 뛰며,
날며,
피어오르고 싶어서,

1982. 9. 10 서숙희

그는 이미 열아홉에 이름 없는 들풀의 생을 이해하고
있었나보다. 들풀이 꿈을 꾸고 이름을 달고 돌아오길
그는 기대하고 있었다. 기다릴 줄 아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안목이다. 그의 그림에 주요 등장인물인 들풀.
제 시간에 오지 않는 손님을 나는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는 여러 번 수저를 놓고 더운 음식을 내오면서 늦게
온 손님도 기꺼이 맞는다. 50명 100명분의 잔치상을
차리는 그가 늦은 밤 혼자 술 마시는 남편을 위해서는
절대 안주를 만들지 않는다지만 나는 만들어준다.

숨기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모르겠는 사람이기도 한
그가,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이해하기 힘든 사람 중
하나이기도 한 그가 나를 친구라고 부를 때, 나는
가끔 그와 나의 관계를 되짚어보곤 한다.
친구, 라면 뭔가 동등해야 하는 게 아닌가. 노인과
어린아이도 친구가 될 수 있고 처음 만난 사람끼리
하룻밤 연인이 될 수도 있는 게 인간관계이긴 하지만.

나는 그처럼 배추벌레를 손으로 잡을 수도 없고,
찹쌀주먹밥이나 쑥개떡을 종가집 맏며느리처럼 빚지도
못하며, 일 년 내내 텃밭 일구고 처마 밑을 드나드는
새들과 길고양이, 개를 두 마리나 돌보면서 살림하고
그림까지 그리는 넉넉한 품을 도저히 따라갈 재주가
없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십대 초반에 나는 빨리 할머니가 되고 싶었다.’는
그의 바람대로 이른 나이에 할머니가 되었고 사위도
있지만 나는 아직 할머니가 될 생각조차 없다.

친구가 되기에 부족한 점은 또 있다.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그가 나를 구박해온 세월이 꽤 된다.
‘배가 아프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를 만큼 건강한
그가 나를 이해하길 바라는 건 무리일지 모른다.
일단 다른 건 몰라도 술을 마실 만큼의 건강을
만든 다음에 친구라는 관계를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그럼에도 그와 내가 공유하는 게 아주 없진 않다.
태어나 초등학교 3학년까지 살았던 도계가 그의
고향이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을 아버지의 교장
첫 발령지인 영월에서 다녔다. 탄광촌 아이들이
개울물을 회색으로 칠한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서울로 전학을 간 그가 텔레비전과 만화방에
푹 빠졌다면, 6학년 때 춘천으로 전학 온 나 역시
텔레비전과 극장에서 본 영화에 매료되었었다.

그리고 우리는 시간이 흘러 같은 고등학교에서
2년을 1년 터울을 두고 다녔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내가 아는 사람을 그가 알고 있고, 그와 가까운
사람이 오래전부터 내가 알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의 친정어머니가 담은 김장김치를 여러 해
받아먹으면서 내 친정어머니의 맛과 닮았다는
사실도 그러하거니와, 사는 일의 쓸쓸함이 어떻게
위로가 되는지도 때로 그를 통해 배운다.

‘자신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가 눌러왔던 긴
침묵의 시간들이 전시장 곳곳에 펼쳐질 때마다
나는 그의 첫인상을 다시 떠올리곤 한다.
그는 예술가다. 예술가연 하지 않는, 기름지지
않은 담백한 나물무침 같은. 나는 쓸쓸하지만
따뜻하고 단순하지만 외롭지 않은 그의 작업을
지켜보면서. 밥을 먹자고 할 것이고 그는 또
여전히 술을 먹자고 할 것이다. 술 안 먹는다고
구박 받더라도 그렇게 같이 늙어가고 싶다.

남궁순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