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ghts Over the House

집과밤 그림이라는 이름의 자아, 혹은 위안과 꿈

잭슨 폴락의 전시회를 둘러보던 한 미술담당 기자가 야릇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곁에 있던 친구가 이유를 물었다. 기자는 시니컬하지만 매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폴락이 말하길, 그림은 자아를 발견하는 일이라고 했지. 그래서 훌륭한 화가는 그 자신을 그린다고. 그런데……” 기자의 말을 가로챈 친구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러니까 자넨 폴락의 그림에서 그의 자아를 발견하지 못했군. 하기야 이런 추상화에서 화가의 자아를 발견한다는 게 웃기는 일이지.”하고 아는 소리를 했다. 하지만 이어진 기자의 대답은 전혀 달랐다. “아니, 폴락의 자아가 이렇게나 깊다는 것에 놀라고 있는 중이야.”

서숙희의 2016년 전시회 그림들 앞에서 이 일화를 떠올린 건 형체를 색채 깊숙한 곳에 묻어버리거나 두터운 색채의 안개에 숨긴 채 보일락 말락 드러내는 그녀의 그림이 폴락의 추상화들과 겹쳐진 때문이 아니라, 우주의 청회색 가스층에서 발견한 화가의 자아에 나 또한 “이렇게나 깊었나?”하고 놀랐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본 것이 그녀의 자아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화가의 손을 떠난 그림은 작가의 손을 떠난 글이 그렇듯, 온전히 감상자에 의한, 감상자를 위한, 감상자의 것이다. 그러니 내가 그녀의 그림들에서 본 게 그녀의 자아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런데, 그림에서 발견되는 자아란 무엇이며, 그림에서 자아를 발견하는 일은 어떤 가치를 가지며, 훌륭한 화가가 그 자신을 그린다는 건 무엇이며, 그 자신을 그리는 일은 또 어떤 가치를 가지는 것일까? 이 질문에 내놓을 수 있는 답은 무수히 많겠지만, 그림에 대한 안목이 짧고 얕은 나는 한 가지 답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 답은 “오직 자신만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이라는 말로 수렴된다. 오직 그만이 그릴 수 있으므로 ‘자아’라는 말을 붙일 수 있고, 그래서 그 그림이 가치 있는 그림인 것이다. 요컨대, 서숙희의 그림은 오직 그녀만이 그리며, 그녀만이 그릴 수 있다. 어디에서도 나는 그녀의 그림과 같은 그림을 본 적이 없다. ‘개성’이라는 단어에 모두 담을 수 없는 그녀의 독특과 유별은 무너뜨릴 수 없는 가치를 만들어낸다.

서숙희의 지난 전시회들을 찾아왔던 사람들이 들려준 감상의 변들 가운데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은 ‘위안’이었다. 그녀의 그림들에서 받게 되는 위안은 어쩌면 그녀로 하여금 붓을 놓지 않도록 만드는 가장 큰 이유일는지도 모른다. 독특과 유별이 화가 서숙희가 가질 만한 자부심이라면, 감상자들이 거의 공통적으로 받아가는 위안은 인간 서숙희에게 가져다주는 소중한 선물이란 생각이 든다. 사실 이 선물은 10년 전인 2006년의 전시회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에서 듬뿍 받은 것이기도 하다. 나는 그때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어떤 이는 이담의 그림에서 몇 줄의 시를 읽고, 어떤 이는 조곤조곤 긴 사설을 듣는다. 어떤 이는 그녀의 그림 앞에서 쓸쓸히 가슴을 쓸어내리고, 어떤 이는 가만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는다. 이 상반된 반응이야말로 서숙희라는 화가의 매력이거니와, 그녀를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뭐 하나 똑 부러지는 게 없는 그녀 특유의 ‘머뭇거림’이 그 이유다. 그런 그녀야말로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바로 그 사람이지 않을까.”

위안은 대상과 감상자의 눈이 같은 높이에 있을 때 얻게 된다. 그래서 우러러 보아야 하는 존경과 다르다. 위치를 달리하면 위압이 되는 존경은 그래서 위안을 주지 못한다. 태생부터 ‘높은 곳’과는 거리가 먼 서숙희에게 위안은 당연한 것이리라. 그녀의 머뭇거리는 발길은 그녀의 손을 잡게 하고, 대상에 대한 그녀의 연민은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하며, 내면을 향한 그녀의 침잠은 우리를 서두르지 않게 만든다. 위안이 일방적인 획득이 아니라 주고받음이라는 것을, 이것이 예술의 소중한 덕목이라는 것을 그녀의 그림들은 조용히 읊조려준다. 서숙희의 그림들은 머물지 않고 흐르는 강과도 같다. 2006년과 2011년, 두 번의 전시회에서 그녀의 그림들이 보여준 ‘변화’는 보기에 참 좋았다. 정통 문인화가 한 굽이를 흐르며 담묵과 순정한 선묘의 ‘사라지는 것들’로 바뀌고, 선묘가 옅은 안개에 가려지며 침잠의 여울로 건너간 것이 다섯 해 전까지의 일이다. 이제 2016년으로 건너온 그녀의 강은 또 한 번의 ‘다름’을 보여준다. 짙고 깊게 화폭을 파고들어간 안개는 강의 흐름을 감추고, 자잘하게 절개한 상처와도 같은 무수한 세필자국을 감추고, 아득한 환몽(幻夢)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아늑하고, 아득하고, 그립다.

그가 오래, 그녀만의 그림으로, 늘 변화를 꿈꾸며 우리 곁에 있기를 빈다.

-하창수(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