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ees Beside Me

가까이있는 나무들 섬세한 선과 가라앉은 색으로 쓴 시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기형도의 시, <빈집>에서

압도적으로, 이담의 그림은 시(詩)다. 유난히 그의 그림들 앞에 오랜 시간 발길이 머무는 까닭은 그가 쓴 시를 읽고, 그 행간의 의미를 새겨야 하기 때문이다. 친절하게 시들을 화제로 옮겨주었던 이전의 그림들과는 달리 단 한 줄의 화제도 남기지 않은 채 오직 선과 색채로만 ‘써’놓은 이번 전시의 ‘시’들은 훨씬 더 오래도록 발길을 잡는다. 뒷길의 나무들, 오래된 숲, 나비가 날아와 앉았다, 담뱃가게 하던 집 마늘밭과 감자밭, 정선 가는 길, 푸른 가방과 선인장…… 나는 그의 그림과 그림 사이의 빈 공간에서 화판 앞에 웅크린 릴케와 김수영, 혹은 기형도의 검푸른 등을 본다.

시의 이 압도적인 힘에서 풀려나기 시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그의 섬세한 선과 가라앉은 색채를 만난다. 그의 그림들은, 전시회가 열릴 때마다 적지 않은 변화들을 보여주었다. 조선의 문인산수화를 연상시키는 산수도와 작가의 일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질박한 정물화가 주축이었던 초기의 그림들에서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애틋함을 쓸쓸하면서도 애정 어린 눈길로 담아냈던 지난 전시회의 그림들 사이에 놓인 변화의 양상은 그의 다음 창작이 어디에 이르게 될는지 기대를 모으게 했었다. 그 기대가 집중된 이번 전시의 그림들은 변화보다는 심화의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 더 깊어진 색감과 주목할 대상을 도드라지게 드러내는 기법, 배경의 생략과 단순화, 기호나 부호처럼 표현하는 것까지 – 그는 넓게 헤쳐 놓은 땅을 깊게 파고들어간다.

깊게 파들어간 땅이 다시금 넓게 헤쳐져 있을 다음 전시가 벌써부터 기대된다.

-하창수